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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헝가리 부다페스트 의회

발렌베리는 1945년 1월 17일에 소련인들에 의해 납치되어 다시는 자유를 찾지 못했다. 이탈리아 시민인 조르지오 페를라스카는 스페인 외교관 행세를 하며 수천 명의 헝가리 유대인을 구했다. 부다페스트에는 발렌베리를 기리는 두 개의 기념물과 카를 루츠의 기념물 하나, 조리지오 페를라스카의 기념물 하나가 있다.

헝가리 해방 후에 소련군의 점령이 이어졌다. 이는 1991년에야 끝이 났다. 소련의 영향권 아래 1949년 헝가리에 공산주의인민공화국(헝가리민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새로운 공산주의 정부는 부더성 같은 옛 건물을 이전 정권의 상징으로 간주했고 1950년대에 왕궁을 철거하고 내부를 파괴했다.

1956년 10월 23일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데모대는 부다페스트 라디오방송국으로 가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방송하라고 요구했다. 정권은 군대에 발포 명령을 내렸다. 헝가리 군인들은 총을 시위대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이 1956년 헝가리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시위대는 임레 너지를 헝가리수상으로 임명하라고 요구했다. 놀랍게도 '헝가리노동자당'의 중앙위원회는 당일 저녁에 임레 너지를 헝가리수상으로 임명했다. 이 봉기는 10월 23일부터 11월 11일까지 계속된 반소봉기였다. 너지가 헝가리는 바르샤바조약을 탈퇴하고 중립국이 된다고 선언한 후에 소비에트 탱크와 장갑차가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헝가리에 진입했다. 전투는 11월 중순까지 계속되었고 3000명 이상이 죽었다. 2006년 봉기 50주년을 맞아 1956년의 봉기를 기리는 기념물이 시민공원 끝에 세워졌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헝가리는 풍자적으로 동유럽권 국가 중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일컬어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입은 피해는 상당수 복구되었다. 에르제베트다리 보수는 1964년에 끝이 났다. 1970년대에 부다페스트 지하철의 동서 M2노선이 처음 개통되었고 뒤이어 1976년에 M3노선이 개통되었다. 1987년에 부더성과 다뉴브 강변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밀레니엄지하철, 회쇠크테레, 바로슐리게트를 포함한 언드라시대로가 2002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980년대에 부다페스트의 인구는 210만 명에 달했다. 최근에 페슈트주에 있는 도시로 대량 이주가 일어나 인구가 뚜렷하게 감소했다. 20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1989~1990년의 정치적 변화(철의 장막 붕괴)가 부다페스트 거리 풍경의 변화를 낳았다. 독재의 상징물이 공공 장소에서 제거되었고 조각 공원으로 변했다. 새로운 민주주의 20년 동안 부다페스트의 발전은 가보르 뎀스키 부다페스트 시장이 이끌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다페스트 [Budapest] (유럽지명사전 : 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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