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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국제교류지원센터와 함께 떠나는 비대면 러시아여행15

국제교류지원센터와 함께 떠나는 비대면 러시아여행15

 

고독은 각 개인에게도 낯선 영향을 미치지만, 세계의 주류에서 벗어난 민족에게는 훨씬 더 해악적인 영향을 미친다. 러시아의 예술과 태평양의 많은 고도에 사는 주민들의 예술이 그것을 증명한다. 또한 기질이나 모종의 질병 때문에 은둔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화가와 조각가의 삶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 지도를 보면(예술을 연구할 때는 늘 곁에 지도를 놓아두는 것이 좋다.) 우랄 산맥에서 발트해와 카르파티아 산맥에 이르는 드넓은 평원이 눈에 들어온다. 이 평원에는 남에서 북으로, 혹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들이 많지만,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은 없다. 동에서 서로 흘러든 것은 강이 아니라 떠돌이 슬라브족이었다. 이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 자리 잡은 민족들과 같은 혈통을 지녔지만,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다른 지역과의 접촉을 완전히 끊고 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러시아 -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예술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반 룬의 예술사, 2008. 5. 6., 헨드리크 빌렘 반 룬, 남경태)

당시에도 지금처럼 그들에게는 자치 능력이 없었다. 자연은 진공 상태(특히 정치적인 공백)를 싫어하므로, 유능한 족장이 없는 이 광대한 지역은 불모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사는 야심차고 용감한 주민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애국적인 러시아 역사가들도 인정하듯이 바이킹의 침략과 지배를 초래한 것은 슬라브족 자신들이었다.

첫 외국인 행정관 류리크(Rurik)가 대(大)노브고로트(니주니노브고로트와 혼동하지 말 것)에 도착한 것은 862년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뒤에 스칸디나비아인들은 흑해까지 진출해 911년에 차르그라드(콘스탄티노플의 러시아 이름)의 지배자들과 최초의 조약을 체결했다. 남진하는 길에 그들은 드네프르 강변에 있는 아주 오래된 도시 키예프를 점령했다. 이후 이 도시는 러시아 평원 전역의 교역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을 통해 러시아의 모피, 곡물, 밀랍, 노예가 지중해의 포도주, 말린 과일, 비단 등과 교환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러시아 -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예술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반 룬의 예술사, 2008. 5. 6., 헨드리크 빌렘 반 룬, 남경태)



 

동로마제국의 수도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성직자들의 눈에 이 번창하고 이교도 인구가 많은 키예프는 당연히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열성적인 선교사들은 드네프르강과 데스나강의 낮은 강둑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원주민들은 느슨한 자연 숭배에 열중할 뿐 뚜렷한 신앙이 없었으므로 선교사들은 북유럽의 황야로 들어간 동료들과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드디어 988년에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 이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문화적으로 완전히 비잔티움 제국에 속했고 로마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러시아 성당은 991년 키예프에 세워진 것인데, 장방형의 비잔티움 성당을 그대로 본떴다. 비잔티움 양식은 적어도 러시아 남부에서는 그 뒤로도 수백 년 동안 충실히 지켜졌다. 그러나 북부에서는 '집회소'의 건축자재로 목재를 사용해야 했으므로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나는 일부러 '집회소'라는 말을 썼다. 그 사회가 뉴잉글랜드의 분위기를 풍긴다는 의미다. 러시아의 촌락은 토지 공유제를 골간으로 조직되었으므로 촌락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집회소가 필요했다. 초기 러시아 교회는 바로 그 집회소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매우 실용적인 시설이었다. 더욱이 벽마다 성상이 걸려 있었으므로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주기에도 좋았다. 또한 교회는 지방 토호들의 금고로도 애용되었다. 동서 양방향의 침략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는 이 나라에서, 각지에 세워진 교회와 수도원은 평원을 가로질러 침략해오는 타타르(Tatar)1) 야만족 무리를 방어하는 요새의 기능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러시아 -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예술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반 룬의 예술사, 2008. 5. 6., 헨드리크 빌렘 반 룬, 남경태)


 

이처럼 교회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긴밀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지리적·사회적 필요에 따라 건축 양식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건축자재라고는 목재밖에 없었으므로 대형 교회는 건축이 불가능했다. 비잔티움 양식은 아치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으나, 러시아에서는 겨울에 눈이 쌓이지 않도록 경사를 더 가파르게 해야 했다. 종 모양의 큐폴라(cupola)2)가 많은 아시아 불교 사원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인들은 양파 모양의 기묘한 첨탑을 개발했는데, 훗날 이 첨탑은 러시아의 풍경에서 뗄 수 없는 일부분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러시아 -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예술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반 룬의 예술사, 2008. 5. 6., 헨드리크 빌렘 반 룬, 남경태)


중부 유럽의 그림엽서를 본 사람은 기억하겠지만, 그런 양파 모양의 첨탑은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등 중부 유럽 각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이 묘한 우연의 일치에 관해서는 나도 설명할 길이 없다. 추측해보면, 16세기 반(反)종교개혁 시대에 등장한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의 양파 양식은 예수회 수사들이 전해준 게 아닐까 싶다. 그들은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600여 년 동안 차지했다가 떠나면서 남긴 건축물들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수입된 다른 예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회화다. (러시아는 남방의 이웃들로부터 그리스 알파벳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이후 첫 3세기 동안은 성화(聖畵)에 관한 까다로운 비잔티움식 규칙이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 뒤 러시아는 타타르인에게 정복되었다.3) 그들은 13세기와 14세기의 대부분에 걸쳐 러시아를 지배했다. 마침내 그들을 쫓아낸 러시아인들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타타르인은 해일만큼 파괴적이었다.

조국을 해방시킨 위대한 애국적 의거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회화와 건축은 전보다 민족적 색채가 더욱 강해졌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에게 정복되자 러시아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동쪽은 튜턴기사단과 스웨덴인들에게 차단되었고, 남쪽의 지중해 방면은 이슬람 세력이 가로막았으며, 중부에서는 폴란드가 러시아와 서유럽 국가들의 직접적인 교류를 막았다. 당시 러시아의 고립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1492년, 즉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에 있었던 사건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러시아 -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예술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반 룬의 예술사, 2008. 5. 6., 헨드리크 빌렘 반 룬, 남경태)


 

오스트리아의 어느 주교는 모스크바를 찾기 위해 여러 차례 탐험대를 보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표트르 대제(Pyotr Veliky)4)가 드디어 오랫동안 러시아를 이웃 나라들과 격리시킨 장벽에 구멍을 뚫었다. 용감한 탐험가들은 이 부유한 미지의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서둘러 동쪽으로 달려왔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다른 세계와 일체의 접촉이 끊어져 완전히 화석화된 예술이었다.

그 뒤 러시아는 현대 예술에 크게 기여했으나 실은 서유럽 예술을 러시아 취향에 맞게 살짝 수정한 것에 불과하다. 전형적인 슬라브 예술을 보여주는 것은 교회와 회화인데, 러시아 혁명 이후에 서방 세계에 알려졌다. 격변기를 맞아 러시아 전역이 대대적인 약탈을 당하면서 수많은 성화들이 폴란드와 루마니아 국경을 통해 불법으로 반출되었다. 이 밀수품들은 서유럽과 미국의 수집가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렸다.

옛 성인들의 생애와 일화를 묘사한 러시아 성화는 보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깨달음을 준다. 기술적으로는 결함이 많아도 독특한 호소력이 있다. 우리의 기법에 비추어보면 좋은 그림이 아니다. 학교의 미술 시간에 배우는 조화로운 색채 배합의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진부하고 사소한 이야기를 진부하고 과장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성화에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고 좋아하도록 만드는 힘이 숨어 있다.

나는 그 힘이 정직하고 순수한 목적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예는 500~600년 전의 그림들이다.

12세기나 14세기의 슬라브 농민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생활철학이 아니었고 도덕률은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구세주, 사도들, 성인들이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생생한 이야기였으며, 참된 신도가 천국의 축복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열쇠였다. 물론 그 천국은 가난한 농부들이 현세에서 견뎌야 하는 삶과는 정반대였다. 천국은 거리가 황금으로 번쩍이고 하늘이 언제나 푸른 곳이었다. 누구나 언제든지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상냥한 천사들이 관리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종교화―평범한 무지크(muzhik)5)가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졌으나 심한 억압 속에서 사는 민족의 모든 행복한 꿈을 담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와 역사적 배경이 판이하게 다르고, 논리적으로 따지면 우리와 하등 관련이 없는 러시아 예술에 우리가 매료될 수 있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러시아 -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예술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반 룬의 예술사, 2008. 5. 6., 헨드리크 빌렘 반 룬, 남경태)

 

 

러시아 비대면 여행 함께 떠날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국제교류지원센터는 다양한 교류와 해외 문화탐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여러분과 함께 열어갈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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