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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국제교류지원센터와 함께 떠나는 비대면 러시아여행6

국제교류지원센터와 함께 떠나는 비대면 러시아여행6

 

키예프 루스가 정교회를 국교화하기 이전에 루스인들은 주로 토속 신앙을 믿었지만, 키예프의 올가 등의 정교회 신자도 소수나마 존재하였으며, 988년에 키예프 루스의 블라디미르 1세가 동로마 제국에서 파송된 성직자들에게서 세례를 받음으로서 정교회는 루스의 국교가 되었다. 초기 루스인의 연대기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대공은 어느 종교를 신봉할지 신하들과 논의한 끝에 루스인들의 기질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정교회에 귀의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는 훗날 동방 정교회로부터 시성되었다. 루스인들은 정교회를 수용함으로써 비로소 고도의 문명을 전수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각종 예식서, 교부들의 저작 등을 슬라브어로 읽게 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그들이 사용한 슬라브어는 모라비아 지역에 파견되었던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 형제의 글라골 문자와 키릴 문자에 기반하였던 것으로, 루스의 정교회 개종은 이 키릴 문자로 된 슬라브어의 정착을 영구히 확립시켰다.따라서 교회전례들은 민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교회 슬라브어나 고대 동슬라브어로 거행되었으며,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노브고로드 지역의 동슬라브어 방언인 고대 노브고로드어로 거행하기도 하였다. 1015년 블라디미르의 죽음은 곧 내란으로 이어졌다. 블라디미르의 아들 중 스뱌토폴크는 자신의 형제들을 제거하고 자신이 루스인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려고 하였다. 그 와중에 동생들인 보리스와 글레프가 희생되었다. 그들은 충분히 형에 맞서 싸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에 대해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형제들을 죽이면서까지 권력을 차지하고자 했던 스뱌토폴크 역시 1019년에 또 다른 형제인 야로슬라프 공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야로슬라프 공은 현자로 불리었으며 루스를 정교회로 개종시키는 데에 최선을 다하였다. 1037년 야로슬라프 공은 키예프에 성 소피아 대성당 건립 공사를 명령하였고, 그리스인 관구장주교 테오펨프스토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서임되어 키예프에 착좌함으로써 교회행정상 키예프의 성 소피아 대성당은 루스 정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1세기 말 경에 이르러서 루스인들은 더이상 이교도가 아닌 완전한 정교회 신자가 되어 1051년에는 루스인 성직자 일라리온이 키예프 관구장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주교들은 루스인이 아닌 그리스인이었으며 모든 주교품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의해 서임되었다. 따라서 키예프 관구장주교는 루스 내 다른 교구의 주교들을 승인할 권리를 갖고 있기는 했으나,모든 교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였으며 관구장주교로서의 실제적인 권한도 행사하지 못했다.

 


17세기 중반 알렉세이 로마노프가 아버지 미하일 로마노프에 이어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스테판 보니파티예프 신부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도덕성을 회복하려는 열성신도의 운동에 전적으로 동의하였고, 러시아 전역은 일대 정신적 부흥을 일으켰다. 그러나 1653년 황제가 비호한 니콘이 모스크바 총대주교로 선출되자 분란이 일어났다. 신임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1653년 십자성호를 긋는 방식(두 손가락이 아닌 세 손가락으로 긋는 것)을 포함한 교회 의식을 새로운 그리스 교회식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또한 서유럽 장로회와의 교류도 보수적인 러시아 정교도의 심기를 건드렸으며,많은 이들이 그리스 예식 수용을 거부하며 총대주교에 저항하였다.그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전례를 점차 변화시켜 왔으나 러시아를 포함한 루스 정교회는 아직도 10세기 개종 당시 전수 받은 전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이 같은 정책에 반대하며, 루스인의 정교회 전통은 다른 지역교회들의 전통보다 훨씬 우월하므로 절대 바뀌어선 안된다고 하였다.이로써 1656년 러시아 정교회는 신예식파와 구예식파로 분열되었으며,전통을 고수하는 구예식파가 박해받기 시작했다.이때 분열된 구예식파는 다시 둘로 나뉘었다.하나는 재성직자파(Поповцы)로 이들은 성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고 1846년부터 자신들의 주교도 가지게 되었다.다른 하나는 부재성직자파(Безпоповцы)로 이들은 성직자를 가지지 않은 상태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그외 분파로는 두호보르파가 있는데,이들은 폭력에 반대하는 기독교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고,하느님 외에 누구에게도 복종할 수 없다는 신념에 따라 인간적인 권위를 부정하는 교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그래서 이들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캐나다로 집단이민을 가야만 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9F%AC%EC%8B%9C%EC%95%84_%EC%A0%95%EA%B5%90%ED%9A%8C

 

국제교류지원센터는 항상 여러분과함께 세계를 열어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서 해외에 자유롭게 여행할수가 없습니다. 분명 여행이 자유로운날도 올것입니다. 그때에 국제교류지원센터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전한 여행 감동이 있는 여행 여러분과 함께할것을 약속합니다. 모두 모두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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